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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교회 역사는 1784년경 이승훈(베드로)성인 (인천 반주골 성지)에 의해 학문 으로 들어와 공부하던 중, 성인께서는 느끼는바 이는 학문이 아니라 종교라는 것을 깨닭고 중국으로 들어가 세례를 받게됩니다.
성인은 함께 공부하던 학자들에게 천주학을 전파하고 선교하므로 한국 천주교의 출발로 알려져 왔습니다. 혹자는 광주군 퇴촌면 맹자봉 기슭에 보잘 것 없는 암자가 하나 있었고, 어느 때인가 없어져 추추돌만 남아 있는 자리가 있는데, 1779년 겨울 이곳 천진암에서 한국 천주교는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주평국신부 지음= 전국 성지순례 안내책자 발췌>
그 이후 우리나라 천주교는 김대건 (안드레아)신부와 최양업(토마) 신부를 배출하게 되는데, 1844년 12월 중순 김대건과 최양업은 페레올 주교님으로부터 부제품을 받습니다.
이는 나이 24세의 나이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기에 부제품을 받은 것입니다.
16세의 소년으로 고국을 떠나 25세 청년 부제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이후 1845년 8월 17일 페레올 주교님의 집전으로 중국 상해 근방 금가항이란 곳에 있는 신학교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된것입니다. 그리고 상해를 떠나 서해안 강경의 황산포(나바위 성지)에 10월 12일에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은 신부 자격으로 고국의 땅을 밣은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6년 5월 25일 황해도 연평도에 닿았고 그곳에서 포졸들에게 잡혔습니다. 1846년 9월16일 그는 한강가의 새남터 형장에서 참수 당한 것입니다. 고국에 온지 불과 6개월, 사제품을 받은지 9개월 만에 김대건 신부님은 짧은 선교 활동을 마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1801년 8월 순교)와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6명의 프랑스 사제와 더불어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이곳 절두산에서 하느님께로 간 것입니다. ↑<계몽사 위인전 발췌>
그외에도 배교를 거부한 1만여명의 무명 순교자의 목을 잘라 시체를 한강물에 내던졌던 합정동 절두산 성지,<위인전> 그때의 많은 이들이 흘린 피로 인해 주변의 한강 물은 피비린내가 진동하였고 주위는 빨갛케 물을 들인듯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절두산 성지의 바위가 빨간것이 그때의 피로 얼룩졌기 때문이라 할 정도입니다
↑<97년 절두산 성지 신부님 강론>
그리고 44위의 순교 성인을 포함하여 수많은 순교자가 순교한 한국 최대의 순교지로는 서소문 성지(지금의 염천교)가 있습니다.
또한 김 신부님보다 4년 늦게 사제 품을 받고 12여년간 전국을 떠돌며 하늘을 지붕 삼고 노숙을 하며, 교우라도 만나면 집신을 얻어신고 집신이 떨어지면 맨발로 다니고 순교한 어머니를 생각하여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어가며 조국에서 활동하던 최신부님은 피로와 무리한 활동으로 쓰러져 제천 배론 옹기마을 신학당 뒷산에 묻혔다합니다
위의 두 신부님을 가르켜 김신부님을 피의 순교자, 최신부님을 땀의 순교자라 일컬을 만큼 높이 평가 받고 있으며, 최신부님은 아직 성인 품에 오르지 못하고 있으므로 관계 기관에서 성인 품에 오르시도록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99년 배론성지 관리소장 배은하 타대오신부님 강론중>
그럼 잠시 우리의 옛날 한 성인에 대하여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황사영(알렉산데르) ; 고 향 : 강화읍 월곡리 대금도. 묘 : 양주 장흥 부곡리 가마골.
황사영은 정약현의 바로 위 형님인 정약종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바로 이분 정약종의 둘째 아들이며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인 것입니다. (정하상과 황사영은 사촌 처남 매부 지간임)
이미 16세에 장원급제한 황사영은 정조가 친히 과거 급제장까지 내려와 황사영의 손을 잡으며 나이 20세가 되면 등용을 약속하고 임금이 내리는 장학금을 받을 만큼 앞길이 창창했던 인물이지만 정약용으로부터 천주학을 전해듣고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를 하게됩니다. 옛날 어수를 받으면 정2품의 직급을 받게 되는데 궁궐 안의 무술이까지도 임금이 손을 잡게 되면 상궁을 거르리고 정 2품의 직급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정권은 정조가 죽고 순조(1790∼1849)가 즉위하자 황사영의 운명은 바뀌게 됩니다
수렴청정을 받던 순조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고, 포도청의 포졸들은 황사영을
잡으러 다니지만 황성인은 붉은천으로 어수를 항상 감고 다녔기에 감히 눈앞에 두고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건은 터지고 맙니다.
황사영 백서가 바로 사건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 때 대원군에 의해 황사영 백서사건을 계기로 많은 성인들이 육시형등 극형으로 참수, 또는 귀향살이를 하게 됩니다 백서사건은 1801년 8월 주문모 신부님의 처형 소식을 전해들은 황성인이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님께 보내는 탄원서를 황심이를 통해 보내게 되는데 백서는 명주자락에 "1만 3천 3백 11자"로 울분과 신심을 기록한 황사영백서가 쓰여지고 품고가던 백서는 황심이 붙잡히면서 황사영도 대역 무도한 죄인으로 능지처참의 극형에 처해집니다. 이때 황사영 성인의 나이 27세. 이 사건으로 유복자를 길러낸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 정난주(마리아)는 제주도로, 외아들 경현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십 수명이 공범으로 처형됩니다.
이승훈의 처남인 정약용 역시 전남 강진으로(다산 초당) 유배 18년간의 유배, 죽음을 앞두고 유배에서 풀려 지금의 생가터가 있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묻히게됩니다.
10년후 병인 박해, 신학당(제천 배론성지) 집주인인 장주기와 선교사 신부 또한 형장의 이슬됩니다. 백서 원본은 근 100여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 비로소 빛을 보게됩니다. 뮈텔주교는 1925년 한국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교황 11세께 봉정 했고 현재 백서 원본은 바티칸에 소장돼 있다고 합니다. ↑<성지순례 책자 발췌>
또한 최양업 신부님의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 회장님의 가족들은 지금의 과천 청계산속으로 숨어들었고 후에 이웃주민의 신고로 포졸들이 붙잡으로 달려왔을 때 더는 피할 곳을 포기하고 붙잡히게 됩니다. 최경환 회장님은 우리나라 103위 성인 품에 오를수 있었지만 그에 부인인 이마리아는 한번의 배교로 말미암아 성인 품에는 오르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인 즉 이 마리아는 최신부님의 아래로 14세부터 어린 젖먹이까지 여러 동생들을 두었다고 합니다. 이마리아는 형리들의 모진 매와 굶주림으로 유두까지 터져 젖이 나오질 않아 어린아기는 꼬박 이틀을 울어 입안은 하얗게 터졌고, 이마리아는 자식만을 살리겠다는 생각에 배교를 결심하고 형리들에게 배교 약속을 합니다.
하지만 3일 후 아기는 굶주림으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이 마리아는 배교의 약속을 파기하고 순교하기로 결심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성인 품에 오르는 것을 약속받고 순교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을 배신하는 행위를 않은 것입니다.
다른 자녀들은 옥중의 어머니 곁을 떠나지 못하고 포졸들이 쫓으면 달아나고 포졸들이
안보이면 다시 찿아오기를 반복하자 어머니가 순교할 수 있도록 자녀들에게 부탁을 하게 됩니다. 다시는 어머니를 찿지말고 4형제가 똘똘 뭉쳐서 의롭게 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걸인 생활을 하던 중 잔치집에서 얻은 떡 하나를 어머니 생각에 먹지 못하고 감옥을 찿아가 어머니께 전하며 말합니다. 어머니 저희들은 많이 먹었습니다.
이것은 어머니 몫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어찌 어머니로서 바짝 마르고 하얗게
타버린 어린 아이들의 입술을 보고 많이 먹었다고 보겠습니까? 떡은 아무도 먹지 못하고 말라 버리고 맙니다. 그만큼 자녀들의 효심 또한 깊었다고 합니다.
갖은 고초를 격은 후 이마리아는 참수를 당하게 되는데 어린 자녀들은 자기 어머니를 죽일 때는 단칼에 죽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망나니를 찿아가 동냥을 한 엽전 두어잎을
건내며 말했다고 합니다. 어느 누가 자기 어머니 죽이는데 잘죽여 달라고 사정합니까?
그만큼 목을 쳐 죽이는데 단 칼에 죽는 일이 힘들고 고통 스러웠다고 합니다.
↑<계몽사, 성지순례 책자, 배은하 신부님(베론성지 주임)강론중>
위와 같이 우리 성인들의 모진 고초와 굳건한 신앙생활이 우리나라의 가톨릭 신자수를
전인구의 9%로 성장할 수 있게 하였으며, 대주교님의 지향은 우리 신자수를 2000년 대희년까지 18%로 성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있고. 우리성당은 1995년 12월 성북동 인구수 19,333명, 신자수 1,806명 구성비 9,3%이던 것을 2000년 9월 현재 성북동 인구수 16,539명 신자수 2,393명으로서 구성비 14.5%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서울 대교구 신자수는 10,5%로 교구대비 3% 높은 편이나 세계의 가톨릭 신자수 약 18%와는 약 3% 낮은 편입니다. ↑(2000년 10월 12일, 연중 제 32주일 본당 주보 발췌)
우리는 옛 조상들의 숭고한 신앙 정신을 본받아 단 한번의 배신 행위도 없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 신자 수를 18%가 아닌 36% 그 이상 100%의 가톨릭 국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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